<히로시마 노트> 서평 by rus in urbe

리가 무언가로부터 두려움이란 감정을 느낄 때, 그 무언가는 막연한 미지의 대상일 경우가 많다. ‘그것이 내게 적대적인지? 그렇다면 나는 어떻게 대응을 해야 할지?’에 대해 아무런 정보가 없는 상황에서 어쩌면 두려움은 필연적이다. 이를 극복하기 위해선 미지의 대상을 알아가는 과정이 필요하다. 정체가 밝혀진 대상은 안도감을 주기 때문이다. 반면에 앎으로써 극복할 수 없는 두려움도 존재한다. 근래에 읽은 <히로시마 노트>가 그려낸 핵의 공포가 내겐 그렇게 다가왔다.
오에 겐자부로의 <히로시마 노트>는 원폭이 떨어진 지 20여년이 지난 히로시마를 담고 있다. 오에는 그 모습을 통해 ‘원폭의 위력이 아니라 피해의 인간적 비참함’을 알리고자 한다. 죽은 피폭자들과 죽음을 향하는 피폭자들의 사연은 따라 읽기만 해도 충분히 비참하다. 원폭증이 언제 생명을 앗아갈지 모르는 불안 속에서 생존한 피폭자들의 전쟁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핵이 빚어내는 비참함은 단순히 죽음에서 그치지 않는다. 피폭자들의 삶과 유리되어 정치적 이해관계에 매몰되어 가는 반핵운동, 이마저도 아랑곳하지 않고 자행된 당시 중국의 핵실험은 독자로 하여금 의지로조차 낙관할 수 없게끔 한다. 당시에도 이랬는데 50여년이 지난 오늘날에도 현실은 크게 변하지 않았다. 후쿠시마에서 북한으로 점점 가까워져 오는 핵의 공포에 우린 너무 둔감한 것이 아닐까? 비참함을 알아갈수록 두려움은 커질 수밖에 없었다.

책 중간에 피폭으로 눈이 먼 노인에게 ‘한국전쟁을 끝내기 위해 원폭을 사용하려는데 어떻게 생각하느냐’는 질문을 던지는 미국 언론인이 등장한다. 이런 질문의 기저엔 핵이 터진 최악의 상황 속에서도 어떻게든 인류는 살아남을 것이라는 휴머니즘이 존재한다. 바로 이 추악한 믿음이야말로 <히로시마 노트>가 고발하는 비참함의 정점이다. 비단 핵 문제뿐일까? 재래식 무기들로 이뤄지는 전쟁이라고 비참하지 않은 건 아니다. 그 밖에도 수많은 인류의 참상들이 우리 곁을 떠나지 않고 있다. 그래서 여전히 구체적인 앎은 중요하다. 두려움에 떨지언정 더 이상 비참해지지 않기 위해서 말이다. 앎으로써 우린 저런 질문이 잘못되었음을 알 수 있고, 핵무장론과 같은 이야기도 삼갈 수 있게 된다. 바로 여기서부터 핵은 이야기되어야 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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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라마의 제왕> 리뷰 - 드라마에 대한 드라마 by rus in urbe

생방이나 다름없는 드라마 제작의 현실을 고스란히 드러내는 수법은 이미 <그들이 사는 세상>(이하 그사세)에서 익히 보아온 것이다. 쪽대본에 따라 급하게 찍은 테이프는 퀵서비스로 이송된다. 차이가 있다면 사고로 인해 퀵서비스에 이어 테이프를 받아 가는 사람이 조연출에서 제작자인 앤서니킴(김명민 )으로 바뀐 것뿐이다. 동일한 방식으로 시작된 이 드라마에 대한 드라마가 겨냥하고 있는 건 무엇일까? 두 드라마간의 보다 섬세한 대조는 이 질문에 조금이나마 답을 내놓을 수 있게 한다.

<그사세>가 연출자에 초점을 맞춘 이야기였다면 <드라마의 제왕>은 제작자, 혹은 제작 자체에 무게를 둔 모습을 보여줬다. 초점화된 대상이 다르기에 이야기를 추동하는 요소도 다르다. <그사세>의 드라마는 작품으로 취급된다. 연출자는 드라마에 자신의 삶을 투영하고, 제작 과정을 통해 성장한다. 그들이 사는 세상에서 드라마 제작은 일종의 구도(求道)나 다름없다. 따라서 시청률과 같은 세속적 요소가 없는 건 아니지만, 아직까지 드라마는 작품으로 대우되고 있다. ‘작품을 완성해나가는 과정 자체가 <그사세>의 겉과 속을 채우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어쩌면 이것은 드라마를 작품으로 남기고자 하는 소망의 반영일지도 모른다.

반면 <드라마의 제왕>에서 드라마는 철저히 자본과 동일시된다. PPL을 강요하는 제작자의 뜻에 따라 결국 대본이 수정되는 장면은 여기서의 드라마는 더 이상 작품이 아닌 상품이라는 사실을 보여준다. 직접 테이프까지 운반하는 제작자 밑에서 곧이곧대로 찍기만 하는 연출자의 입지는 좁다. 기실 <드라마의 제왕>은 첫 신부터 드라마가 낳는 황금알에 대해 불편할 정도로 조명을 비춘다. 드라마 제작의 신화적 존재인 앤서니킴의 강연은 이라는 단어로 가득 채워진다. ‘의 논리는 각종 통계에서 비롯된 확률로 뒷받침되고 있고, 여기에 학생들은 열광적인 반응을 보낸다.

유치할 정도로 단순한 논리의 강연은 어색한 학생들의 열광과 만나며 '이것이 혹시 웃음을 위한 장치일까'라는 의심을 부른다. 그러나 이 첫 신에서 보이는 일련의 허술함은 어느 정도 의도적인 것으로 보인다. <드라마의 제왕>이 결국 말하고자 하는 바는 드라마는 단순한 상품이 아니다이기 때문이다. 이를 단언할 수 있는 건 앤서니킴의 몰락에 이은 보조작가 이고은과의 결합을 통한 재기가 이 드라마의 주요한 서사라는 걸 손쉽게 예측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 과정 속에서 앤서니킴이 가진 드라마에 대한 생각은 필연적으로 변하게 되어 있다. 따라서 처음부터 드라마가 정말 상품으로 느껴져선 곤란한 것이고, 첫 신은 의도적으로 설득력이 떨어지게 그려져야 할 운명에 처해진다.

결과적으로 <그사세><드라마의 제왕>작품으로서의 드라마라는 같은 과녁을 겨냥하고 있다. 그러나 분명 두 드라마는 다른 방식을 취하고 있다. <드라마의 제왕>에 비해 <그사세>가 리얼하게 느껴지는 이유는 단순히 제작진이 찍은 제작에 관한 이야기라서가 아니다. <그사세>가 추구하는 바가 <드라마의 제왕>보다 이상적이기 때문이다. ‘드라마를 통해 성장하는 사람들이라는 차라리 판타지에 가까운 이야기는 지극히 현실적으로 그려졌을 때 시청자를 공감시킬 수 있다. 반면 <드라마의 제왕><그사세>보다 명확하게 주제의식을 취하고 있다. ‘상품으로 전락해가는 드라마를 건져 올리려는 노력은 명료한 만큼이나 현실적인 주제다. 이를 구현하기 위해 <드라마의 제왕>이 내린 선택은 <그사세>의 반대에 가깝다. 만화적인 캐릭터들은 현실을 훨씬 더 굴절시키며 주제를 강화하는데 동원되고 있다. 첫 신의 허술함 역시 같은 맥락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볼 때 이러한 양상은 큰 이변이 없는 이상 끝까지 지속될 가능성이 높아 보인다.

문제는 이러한 의도적 비현실성이 어중간한 수준에 머문다는 점이다. 택배기사의 죽음이나 회장과 상무의 배신이 드라마에 무게감을 더하고 있다. 그러나 이 무게감은 경쾌하게 스텝을 내디뎌야 하는 만화적인 캐릭터들의 발목을 잡는다. 이것은 비현실적 캐릭터들로 현실적인 주제를 담아내는 과정이 필연적으로 마주하는 곤란이다. 앤서니킴과 이고은의 진지함이 때때로 실소를 머금게 하는 건 이런 연유에서 비롯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어쩌면 아예 만화적이거나 확실하게 진지한 편이 쉬운 선택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미 <드라마의 제왕>은 그 중간이라는 위태로운 레일에 올라섰다. 남은 레일을 어떻게 달리는가가 이 드라마에 대한 드라마가 좋은 '상품이자 작품'일지 혹은 나쁜 '상품이자 작품'일지를 결정하는 잣대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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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7 스카이폴> 리뷰 - 화려한 부활 by rus in urbe

<스카이폴>은 우리가 007시리즈에 기대하는 것들을 의도적으로 배제하고 있다. 배제의 의도성을 증명하는 일은 어렵지 않다. 기상천외한 무기들 대신 주어진 한 자루의 사용자인식 권총은 극 초반에 활용되고 버려진다. 본드걸로 유력해 보이는 두 여배우는 중후반에서 죽거나 역할이 미미해진다. 오프닝 추격신 외엔 크게 화려한 액션도 없고, 초중반의 미행신이 스파이물 특유의 잠입액션을 보여주나 후반엔 이마저도 찾아볼 수가 없다. 극의 중반 이전에 기존 007시리즈를 상징하는 요소들이 사라진다는 사실, 이것이야말로 <스카이폴>이 행한 의도적 배제의 증거가 된다.

화려한 볼거리의 배제는 단순히 시리즈의 쇄신을 목표로 하기엔 위험부담이 큰 결정이다. 007시리즈가 과거에 비해 파괴력이 떨어진 건 분명한 사실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007을 선택한 대다수의 관객들은 익히 알고 있는 007을 기대하며 극장을 찾을 것이다. 따라서 관객의 기대가 꺾였을 때의 좌절감을 채우고도 남을 무언가가 있어야만 이 배제의 기획은 성공을 거둘 수 있다. 그 무언가를 찾는 과정이야말로 <스카이폴> 감상의 첫 걸음이 된다.

극을 마무리하는 저택에서의 전투신을 들여다보자. 007을 지켜주는 첨단무기들은 사냥총, 구식 본드카와 같은 구닥다리들로 대체되고, <나홀로 집에>를 연상케 하는 조악한 트랩들에 의지한 채 본드는 적과 조우한다. 007시리즈의 꽃이자 본드가 목숨을 거는 이유 중 하나인 본드걸의 자리는 웬 할머니(M국장)가 차지하고 있다. 거기에 무난한 총격전을 바탕으로 진행되는 전투양상이 더해지면 기존의 어떤 시리즈보다 지루한 작품만 남게 된다. 그러나 화려함을 덜어낸 자리에서 실제 관객들이 확인하는 것은 지루함과는 거리가 멀다.

그렇다면 무엇이 이러한 배제의 기획을 지루하지 않게 만드는 것일까? 무엇보다도 <스카이폴>은 노쇠한 시리즈 자체를 스토리에 그대로 투영함으로써 화려함이 설 자리를 차단한다. 은퇴를 종용받는 본드와 M국장의 모습은 50년이나 지속되어온 007시리즈에 대한 세간의 평가와 비슷하다. 007시리즈가 계속해서 화려한 무기를 선보이고 스케일이 큰 액션을 담아냈음에도 불구하고 답보상태에 빠져 있었듯이, 본드에게도 더 이상 화려함은 유효하지도 않고 가능하지도 않다. 이렇게 <스카이폴>은 당위적으로 덜 화려해질 수밖에 없어지고, 이는 관객을 충분히 설득하게 된다. 자연스레 본드는 화려함을 벗고 투박한 액션에 치중할 수밖에 없다. Q를 비롯한 본부의 각종 지원이 큰 도움이 되지 않는 점도 이와 같은 맥락에서 볼 수 있다.

<스카이폴>이 갖는 미덕은 화려함을 정당하게 배제시킨 스토리뿐이 아니다. 소재의 화려함을 포기한 부분을 장면의 화려함으로 채우려는 노력이야말로 이 영화의 뛰어난 지점이다. 손에 땀을 쥐게 하는 액션보다도 가슴을 뛰게 하는 아름다운 장면들이 눈에 들어오는 순간 <스카이폴>의 진정한 매력은 시작된다. 몇몇 액션신의 미장센이 불러일으키는 감정은 차라리 애틋함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 이 애틋함의 감정은 늙고 지친 본드의 상황과 한 번 더 겹치며 배제의 기획을 강화한다.

약점이 없는 것은 아니다. 무엇보다도 악역인 실바(자비에르 바르뎀 )의 캐릭터가 심층적으로 다뤄지지 못한 점이 아쉽다. 스토리상 실바는 본드의 부활에 있어 스카이폴 저택과 더불어 제물이 되어야 한다. 그러나 제물이 되기에 실바는 지나치게 평면적 인물로 그려졌고, M국장과의 악연 역시 언급 수준으로만 넘어가 설득력이 약했다. 기실 <스카이폴>이 겨냥한 목표가 007시리즈 자체의 부활이기에, 본드의 극기(克己)도 극에선 필수불가결하다. 이때 본드가 넘어서야할 자신은 늙어서 버려진 요원의 모습(실바)과 어린 시절의 아픔(스카이폴 저택)이다. 그러나 실바의 캐릭터가 강화되지 못하면서 마지막 전투가 갖는 상징성 역시 줄어들게 되고 덩달아 <스카이폴>의 중심축인 부활의 서사도 약화된다. 요컨대, <다크나이트>의 조커가 수행한 역할을 하기에 실바는 턱없이 부족했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번 <스카이폴>은 전체적으로 만족스러운 작품이다. 의도적으로 배제시킨 화려함은 기존의 시리즈를 비롯해 일련의 블록버스터들과 스스로를 확연히 구분 짓고 있다. 더 나아가 이러한 구분이 단순히 차별성을 획득하는 데 그치지 않고 일정 수준의 탁월함에 도달했다는 점은 분명 높게 평가할 부분이다. 50주년을 맞은 007 시리즈는 그렇게 화려함을 내려둔 채 본드의 취미처럼 화려하게 부활해버리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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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쓰기에 대한 글쓰기 by rus in urbe

오늘도 워드프로세서를 실행하고 깜빡이는 커서를 응시한다. 가만히 들여다봐도 좀처럼 글감이나 콘셉트가 떠오르지 않는다. 딱 그만큼을 더 들여다보니 인정하고 싶지 않은 한 문장만 또렷이 떠오른다.

매일 글을 쓰는 일은 쉽지 않다.”

결코 쉬울 거라고 생각한 건 아니지만 예상보다도 벅차고 어려운 일이다. 하루 종일 글 쓸 궁리를 하고, 글을 쓰려고 새로운 경험을 시도해보고, 글이 완결되기 전에 잠들지 않으려고 해도, 글이 술술 써지는 일은 결코 일어나지 않는다. 그렇게 글쓰기가 삶을 잠식해가며, 글쓰기가 나에게 봉사하는 게 아니라 글을 쓰기 위해 내가 살고 있는 기분마저 들고 있다. 어느 샌가 나는 칸트의 정언명령마냥 글쓰기를 목적 자체로 대하고 있는 것이다. 이 절망의 바닥을 또 한 편의 글로 토해내는 현재의 내 모습이 그 완벽한 증거다.

- 매일 글을 쓰는 일이 쉽지 않은 이유.

첫째로 매일 영감을 얻기가 쉽지 않다. 글을 촉발시키는 영감엔 여러 종류가 있다. 일반적으로 일상의 영감은 글의 소재가 되고, 경우에 따라 제재가 되기도 한다. 그 외에도 다양한 방식으로 영감은 글로 변하는데, 그 중에서도 가장 선호하는 유형은 글의 콘셉트를 떠올리게끔 하는 영감이다. 지난 5일간 서평, 문화비평, TV비평을 넘어 단편소설까지 다양한 형식을 추구한 까닭이 여기 있다. 특정한 형식이 떠오르면 내용은 자연스레 따라온다. 베스트는 아침이나 전날 밤에 다음에 쓸 글의 형식이 떠오른 경우다. 그럼 하루를 지내며 그 형식에 써먹을 글감만 모아두고 조용한 밤이 찾아왔을 때 이를 문장으로 풀어내면 된다. 간혹 이 순서가 뒤바뀌는 경우도 있다. 개연성 없이 흩어져있는 글감들이 나중에 떠오른 형식으로 꿰어지는 경우도 있고 하나의 글감이 신선한 형식에 담겨 좀 더 재밌는 작업이 되는 경우도 있다. 문제는 이 형식에 대한 영감이 쉽게 얻어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기실 매일 똑같은 패턴의 삶을 살더라도 생각은 매번 다르기에, 형식의 신선함만 보장된다면 매일 글을 쓰는 일이 그렇게까지 어렵진 않을 게다.

둘째, 내가 사용하는 언어의 폭이 그리 넓지 않다. 첫째 이유가 형식과 관련된 것이라면, 둘째 이유는 형식을 채우는 솜씨에 관한 것이다. 이를테면 어떤 스타일의 건물을 지을 것인가의 문제가 해결되더라도, 건물을 쌓는 기술 자체가 부족해 허술한 결과물이 나온다는 얘기다. 사실 매일 글 쓸 일이 없다면 이런 곤란에 빠질 일도 없다. 가끔씩 자신이 가진 기술을 이용해 필요에 따라 글을 쌓아올리면 그만이다. 그러나 그 작업이 매일 반복된다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즐겨 쓰는 어휘와 표현이 별 다른 고민 없이 튀어나올 때의 당혹감, 새로운 문장을 써보려는 시도가 좌절될 때의 막막함 등은 아무 때나 느껴지는 것이 아니다. 문제는 이 언어의 폭이라는 건 영감의 문제와는 달라서 꾸준한 노력으로 천천히 늘려나가는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이 평범한 진리는 내 언어가 주는 식상함과 더불어 내게 이중의 좌절을 안겨주고, 이렇게 지저분한 하나의 문장을 쓰는 데에도 한참을 고뇌하게끔 한다.

- 그럼에도 불구하고 매일 글을 쓰는 걸 포기할 수 없는 이유.

먼저, 영감을 얻기 위한 노력이 삶을 풍성하게 한다. 다양한 형식의 글을 쓰기 위해선 다양한 형식의 글을 접하는 것이 선행되어야 한다. 따라서 매일 글을 쓰기 위해 다독은 필수조건이 된다. 뻔한 얘기지만 일상에서 색다른 사유를 끌어내려는 노력 역시 마찬가지다. 사고의 한계에 매일 다다르는 일은 그 한계를 확장시키는 최선의 방법이다. 무엇보다도 새로운 경험에 우호적으로 변한다. 이게 언제나 좋은 일인 것만은 아니겠지만 지금의 나에겐 분명 필요한 부분이라고 생각한다. 이로써 글쓰기 영감을 얻기 위해 삶을 사는 것이 내게 일정한 유익을 가져다준다는 사실이 증명되었다.

다음으로 매일의 글쓰기를 통해 언어의 지평을 넓히는 것뿐만 아니라 더욱 정교하게 언어를 사용할 수 있게 된다. 언어의 지평은 끊임없는 노력으로밖에 넓혀지지 않는다고 앞서 지적한 바 있다. 끊임없는 노력이라 함은 새 어휘나 통사구조를 원래 제 것처럼 활용할 정도로 연습하는 일일 테다. 이 연습의 반복을 통해 언어의 지평은 조금씩 확장된다. 이와 동시에 언어의 활용 정도도 정교해질 수 있다. 언어의 확장만큼이나 이미 갖고 있는 언어를 어떻게 쓰는지도 중요한 문제다. 매일의 글쓰기라는 시행착오의 장()은 보다 적확한 표현들을 찾아내는 과정에 가장 적합한 일이다. 생각과 정서가 보다 정교하게 언어화된다는 말은 그만큼 타인에게 덜 오해받을 수 있다는 말이다. ‘덜 오해받는 일이 어떤 의미를 갖는지는 김혜리 기자의 트윗을 통해 생각해보면 좋겠다.

결국 최후의 순간에 중요한 건 내게 반한 사람, 날 좋아하는 사람, 어떤 경우에도 내 편 들어줄 사람이 아니다. 어떤 노이즈가 껴도, 흉하고 징그러운 부분을 포함해 나를 오해하지 않을 사람들이 중요하다. 그들이야말로 나를 계속 제대로 살게 한다. '적어도' 오해하지 않는다. 이것이 정말 희귀하고 소중한 일이라고 통감한다. 사랑과 행복보다 더.

그렇다. ‘적어도오해받지 않기 위해, 그래서 계속 제대로 살기 위해서라도 지금의 고행은 의미가 있다. 어떻게든 눌러 앉아 글을 한 편씩 쥐어짜내는 노력은, 소박한 듯 거창한 내 인생관 잘 살자에 그렇게 부합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오늘은 글쓰기에 대한 글쓰기를 이렇게 실천했다. 그리고 아마 내일도 난 어떻게든 워드프로세서를 실행하고 깜빡이는 커서를 응시하고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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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장토크쇼 택시> 리뷰 by rus in urbe

tvN<현장토크쇼 택시> 시즌2(이하 줄여서 <택시>)를 챙겨보고 있다. 우연히 김구라 복귀 편을 본방으로 보게 된 이후 뭔지 모를 의무감에 목요일마다 리모콘을 좀 더 오래 쥐고 있다. 그러나 과연 다음 주에도 그럴지는 의문이다. 안타깝게도 <택시> 시즌2의 베스트는 첫 회였던 김구라 복귀 편이었고, 나쁘지 않았던 김구라의 고맙습니다’ 1, 2편 이후 급격히 집중력을 잃은 모습이 계속되고 있다. 공교롭게도 그 시점에 전현무의 투입이 이뤄졌다는 사실은 현재 <택시>가 처한 곤란을 들여다보는 단서가 된다.

<택시> 시즌21, 2, 3회분인 김구라의 복귀신고에 이은 고맙습니다방송분에선 김성주가 스페셜MC로 나서 김구라와 호흡을 맞췄다. 아무래도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는 김구라에게 김성주는 적합한 파트너였다. MC가 공유해온 개인사는 택시 안의 긴장감을 적당히 누그러뜨리는데 도움이 되었고, 각자가 가진 상처들은 그 속에서 매끄럽게 여과되어 부담 없이 시청자들에게 다가설 수 있었다. 방송에도 진정성이라는 것이 존재한다면 거기에 가장 가깝게 도달한 순간이 바로 그때가 아니었을까 싶을 정도로 말이다

사실 김구라는 진행자로서 지나칠 정도의 진지한 분위기를 못 견딘다는 덕목을 갖추고 있다. 토크 기반의 예능프로그램이 갈수록 진지함과는 거리를 둔다는 건 주지의 사실이다. 그나마 무게감이 있었던 <무릎팍 도사>조차 점집이라는 콘셉트로 본격 토크쇼의 부담을 덜었다는 점은 이를 방증한다. 김구라는 이러한 예능의 흐름에 적합한 진행자였다. 눈물을 흘리는 강원래에게 오늘 여러 가지 하십니다."라고 일갈하던 모습이야말로 그의 덕목이 드러난 장면이었다. 김구라가 <라디오스타>에서 빛나는 활약을 보여줄 수 있었던 까닭에는 이렇게 진지함을 기피하는 시대적 요구도 포함되어 있었다

이러한 김구라의 덕목은 택시라는 공간에서 벌어지는 토크쇼에도 동일하게 적용된다. 방청객도 제작진도 없는 좁은 차 안에서 게스트와 MC 사이의 벽은 낮아질 수밖에 없다. 대화의 폭과 깊이도 그만큼 넓고 깊어질 확률이 높다. 기실 택시 뒷좌석에 몸을 맡긴 채 상념에 젖는다거나 기사님과 이런 저런 이야기를 격의 없이 나누는 이미지야말로 <택시>가 노리는 것일 게다. 문제는 이런 조건 속에서 지나치게 진지한 분위기가 형성될 확률도 덩달아 높아진다는 점이다. 그러나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위기 상황 속에서 김구라는 구원투수로 올라와 진지함이라는 불을 말끔히 꺼트려버린다. 

이런 메커니즘이야말로 <택시> 제작진이 김구라에게 기대하는 바일 테다. 실제로 김성주와 더불어 이 메커니즘은 효율적으로 작동했다. 김성주는 김구라와 더불어 토크를 이끌기도 했고 게스트에게 공감하며 약간의 진지함을 불어넣기도 했다. 그러나 결정적으로 김성주는 김구라의 놀림감 역할을 맡으며 진지함을 와해시키는데 기여하고, 더 나아가 게스트보다 아래에 위치하는 것을 마다하지 않았다. 이것이야말로 김성주와 전현무의 가장 큰 차이점이라 할 수 있다. 토크쇼에서 게스트에 포커스를 맞춰야하는 것이 마땅한 일이라고 할 때, 김성주는 포커스 밖의 짙은 그림자로서 김구라가 게스트를 비추는 핀 조명을 더 밝게 만들어준다

전현무의 경우는 어떨까. 결론부터 말하자면 아직까진 실패라고 할 수 있다. 방송에 임하는 의욕의 문제를 떠나서 김성주와 전현무의 재능은 그릇 자체가 다르다. 전현무가 갖고 있는 장점은 그림자의 역할에선 발휘되지 않는 성질의 것이다. 요컨대 전현무는 그림자를 맡기엔 지나치게 빛나는 캐릭터라는 것이다. 따라서 전현무가 빛나는 만큼이나 게스트로의 초점화는 불분명해지고, 토크쇼로서 <택시>의 강점 역시 흐트러져버리고 만다. 프로그램 내부에서도 프로그램을 관조적으로 바라보며 진행하는 김구라와 그 내부를 가득 채워버리는 전현무 사이에 게스트가 설 자리는 좁을 수밖에 없고, 좁은 자리에서 대화는 진지할 겨를조차 갖지 못하게 된다. 당연히 김구라는 진지함의 위기에서 세이브를 올릴 기회조차 얻지 못한다. 큰 점수차로 이기는 것이 아니라 팀이 지고 있는 경기라서 말이다

MC 모두에게 생소한 게스트들을 모신 저번 주와 이번 주의 방송은 앞선 논의를 그대로 반영하고 있다. 특히나 2명의 게스트를 한 시간 내에 쪼개서 내보낸 이번 주 방송분은 아쉬움이 크다. 시청자들이 <택시>에 기대하는 웃음은 정통 토크쇼의 그것과 유사하기 때문이다. MC의 역할이 조율되지 않은 채 겉돌고 있는 토크는 전현무의 루시퍼춤 만큼이나 삐걱거리고 있다. 출발한 지 얼마 되지 않은 <택시>, 게다가 두 MC의 복귀작에 더 이상의 찬물을 끼얹고 싶진 않다. MC의 미덕을 잃지 않으면서도 게스트 집중도를 높이는 새로운 메커니즘을 고안해야할 시점이다. 곧 있으면 <무릎팍 도사>가 돌아올 테니 말이다.


이글루스 가든 - 매일 매일 한 편의 글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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